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인배커 작전 (문단 편집) == 결과와 반응 == 라인배커 I, II는 성과 달성 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지지부진하고 간섭많은 롤링썬더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임무 달성 과정에서 항공기들의 적잖은 손실은 있었다. 롤링썬더에 비해서는 현저히 줄었고 공중전에서의 우세도 나아졌지만, B-52의 제파폭격같은 정치적 고려가 들어간 무리수 작전은 심각한 피해로 돌아왔다. 미군이 집계한 바로는 11일 간의 라인배커 II 폭격작전에서 추락한 [[B-52]]는 15기[* 10기가 북베트남에서 격추 5기는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태국]] 및 [[라오스]]에서 추락.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주장은 [[MiG-21]]이 1기 격추했으며 이를 포함한 34기.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26대 이상의 B-52 폭격기 격추. 그러나 북베트남측 전과 주장은 모든 전과 기록이 그렇듯 과장과 오인이 다수 섞여있고, 마이클 매클리어의 추정은 아예 정체불명이다. 정설은 미 공군의 집계 결과인 라인배커 II 이전 아크라이트 임무 도중 1기, 라인배커 II 기간 도중 15기.]이고 33명의 B-52 승무원이 사망 또는 실종됐고 역시 33명이 포로로 잡혔다. 구조된 승무원은 26명. 다른 기종(12기)까지 합치면 43명이 사망 또는 실종, 49명이 포로가 되었다. 대규모 작전인데다 폭격기의 투입이 많았던 까닭에 대령급 비행대장들의 손실도 제법 있었다. 한편 북베트남은 B-52 폭격기 34기와 [[F-111]] 4기를 포함해서 총 81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군측의 손실 집계가 정설로 취급된다. 북베트남 공군은 미 공군 주장으론 6기의 MiG-21이 격추됐고 북베트남 주장으로는 3기의 MiG-21을 잃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북베트남측 손실 발표가 정설이다. B-52D의 후방 기총에 2기, F-4 팬텀 II에 1기가 격추됐다. [[1972년]] 북폭을 강화한 닉슨 대통령은 라인배커 II 작전 당시 하노이와 하이퐁에 10만 발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특히 폭격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이 나왔는데 1,62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2,000채 이상의 민가가 파괴되었다.[* 사실 민가폭격을 엄격하게 금지했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가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1972년 라인배커 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전 1일차에도 몇 기의 분노한 B-52D 파일럿들이 폭격이 금지돼 있던 자람 국제공항에 폭탄을 투하했고(다만 이쪽은 폭격을 예상한 각국 항공사들이 미리 시설을 소개시킨 탓에 인명피해가 크진 않았다. 오히려 이 공항이 MiG-21의 은신처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심한 미 공군은 B-52 승무원들을 격려했다), 라인배커 II 작전이 드디어 돌파구를 마련한 8일차에도 B-52 한 기가 실수로 시장을 폭격해 250여명이 사망했다. 물론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가 십만단위로 나온 롤링썬더 작전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사실 베트남 전쟁 당시 폭격 희생자의 추정치는 투하한 폭탄의 양에 비해 너무 적게 잡힌 추산이긴 하다. 무엇보다 그 시기 북베트남은 폭격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인 추정치를 안 밝혔다. 따라서 앞의 각주에서 언급된 롤링썬더 작전 당시 2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망자 추정치는 로버트 맥나마라가 그 시기에 냈던 통계였다. 그러나 맥나마라 또한 생각을 바꾸었는지, 1990년대 들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1년에 사망자가 100만 명씩 나왔다고, 통일 베트남측 인사들과의 회담에서 주장했으며, 이후 대학 강연에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언론학자인 에드워드 허만은 1970년 기준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 및 군사작전으로 사망한 남북베트남 민간인이 최소 1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산했다.] 심지어 하노이 인근의 박마이 병원이 폭격을 맞아 직원 28명이 사망하기도 했는데, 후일 조사에 따르면 이는 근처의 박마이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 SA-2 미사일 두 발에 맞아 격추된 B-52(콜사인 블루 01)의 폭탄이 추락의 여파로 광범위한 영역에 흩뿌려진 탓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북베트남은 이를 프로파간다에 요긴하게 써먹었으며, [[워싱턴 포스트]] 역시 이 폭격에 대해 '전쟁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몰상식한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일부 미국 언론들은 헤드라인으로 [[제노사이드]], [[커티스 르메이|석기시대 수준으로 야만스러운 행위]], 미치광이(madman)[* 여기서 나온 말이 닉슨(정확히는 [[헨리 키신저|키신저]])이 베트남전에서 처음 사용한 전략인 [[미치광이 전략]](madman theory)이다] 등의 단어를 써 가며 미군의 폭격을 비판했다. 당시 하노이에서 미군의 폭탄 세례를 목격했던 하반라우는 그때의 하노이 상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우리 병사들은 대공포 진지나 로켓포 발사대에서 하노이의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비상사태 속에서 B-52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미군은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공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550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연히 이 폭격 작전에 대해 미국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공산권뿐만이 아니라 당시 서방 진영에 속한 국가들 중에서도 이 폭격 작전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미국을 비판하는 나라들이 있었는데 당시 [[스웨덴]]의 [[수상]] [[올로프 팔메]]는 연설에서 미국의 이 라인베커 폭격 작전은 [[게르니카]] 폭격,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바비야르 학살]], [[카틴 학살]],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s-3|리디체 학살]], 샤프빌 학살(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정권이 흑인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과 다를 바가 없다며 미국의 폭격을 대차게 비판했다. 이 연설을 듣고 빡친 닉슨은 스웨덴에 있던 미국 대사를 철수시키고 미국에 있던 스웨덴 대사도 쫓아내는 걸로 대응했다. 이 연설로 미국에게 단단히 찍힌 올로프 팔메는 이후 [[1986년]]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데,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s-3.1|이때 미국의 [[미국 중앙 정보국|CIA]]가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수상]] [[고프 휘틀럼]]은 닉슨에게 편지까지 보내서 이 폭격 작전을 비판했으며 노동당 내각의 주요 장관들은 '워싱턴은 미치광이들의 통치를 받고 있다', '호주와 미국 동맹관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등의 선 넘는 발언을 쏟아내었다. 편지를 받은 닉슨은 또 머리 끝까지 빡쳤지만 장관들과 달리 휘틀럼 본인은 자신의 비난 메시지를 친전을 통해서 보내고, 공개화하지 않는 자제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스웨덴처럼 미국 대사를 철수시키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이번에는 조용히 전직 [[인도네시아]] 대사 마셜 그린을 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대사로 임명했는데 이 인간은 인도네시아 대사 재임 당시인 [[1965년]] 당시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시킨 쿠데타를 뒤에서 사주한 흑막이라는 평가를 받는 자로 '쿠데타 마스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셜 그린이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로 부임하고 나서 몇 년 후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독]] 존 커(John Kerr)가 수상 휘틀럼을 해임하여 휘틀럼의 [[노동당(호주)|노동당]] 정권을 실각시킨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CIA가 총독을 사주해서 휘틀럼을 실각시키도록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각주][[분류:베트남 전쟁]][[분류:공습/폭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